경주관광(동궁과월지)


#동궁과월지

통일신라시대 궁궐 유적이다.

신라의 별장이자 왕세자가 사는 곳이다.

입장 시간: 09:00 – 21:30
종료 시간: 22:00(자동 오작동)
어른 3,000원 ​​/ 군인,청소년 2,000원 ​​/ 어린이 1,000원

#안압지

조선 초기 동국여지승람과 동경잡기에 기록되어 있다.

안압지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이미 폐허가 되어 갈대가 우거진 호수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들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1980년 발굴현장에서 토기 파편이 발견되어 볼지라는 이름임을 확인시켜주었다.

백성들에게 안압지로 알려졌기에 지금은 함께 쓴다.

674년 문무왕이 경주 월성 동쪽에 호수를 만들고 679년 같은 자리에 별궁으로 동궁을 짓고 여러 건물의 이름을 바꾸었다.

이 기간 동안 신라-당 전쟁과 같은 오랜 삼국 통일 전쟁은 당나라의 공식적인 도독부 철수와 공격 포기로 사실상 끝났다.


이것이 끝나고 평화의 시대가 열리자 정궁인 경주 월성은 협소한 규모를 확장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고, 동궁은 세자의 거처가 되었다.

발트해의 용왕이 된 문무왕이 지은 탓인지 용왕을 위해 제사를 지내던 용왕전이라는 건물이 있었다.

697년, 769년, 881년에는 각료 회의와 파티가 열렸다는 기록이 있고, 804년과 867년에는 대대적인 수리가 이루어졌다.


후삼국시대인 931년 고려 태조가 연회에 초대받았다.

– 나무위키 동궁과 월지 –


볼지 서쪽 호숫가에는 공사장으로 추정되는 5개의 돌담이 확인됐다고 한다.

최남단부터 일련번호가 붙은 1호관부터 5호관까지의 위치를 ​​일컬으며 현재는 복원동 1호, 3호, 5호로 불린다.

그 중 3개만 복원되었습니다.


1호 보원빌딩

규모는 전면 3면, 측면 3면, 높이 9m이다.

1975년 발굴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건물의 구조와 규모를 확정하고 1980년에 누각지붕의 누각을 복원ㅣ


석물은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유적을 따라 연결되어 있으며, 발굴 결과 확인된 것들은 그대로 남겨졌다고 한다.

나머지 석재는 길이가 83m입니다.

건물 옥상에서 떨어진 빗물을 위한 배수로로 보이며,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고 합니다.

연못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3 복원동

5개의 대기실과 4개의 접방이 있으며 높이 10m로 1975년 발굴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건물의 구조와 규모를 고증하여 1980년에 우진지붕 누각으로 복원하였다.


#5 복원동

전면 3석, 측면 3석, 높이 9m. 1975년 발굴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건물의 구조와 규모를 역사적으로 확보하여 1980년 우두머리 누각으로 복원하였다.